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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네딘 지단의 은퇴경기

저는 10여년전 지네딘 지단이 유벤투스에서 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지네딘 지단의 팬이었던 적이 없지만 이번 월드컵 결승전만큼은 프랑스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신문에서는 이번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베컴,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이 트로이카의 시대가 작별을 고한다고 합니다. 베컴의 경우 실력과는 별개로 피구나 지단에 비해 실제 이룬 업적 (특히 국가대항 메이저 대회에서)이 특출나지 않아서 좀 그렇지만, 루이스 피구와 지네딘 지단은 각각의 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축구사의 한획을 그은 만인의 영웅들 아니겠습니까.

루이스 피구,
저는 루이스 피구를 참 좋아합니다. 우선 그가 세계 축구사에 등장한 것부터가 우리와 남다른 인연이 있지요. 1991년 포르투갈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 세계를 놀래키며 등장했는데, 이 대회에서 나중에 우리 포항 스틸러스에서 활약하게 되는 조진호 선수(현 제주 코치)와 맞짱을 떴습니다. 결과는 아쉽게도 우리가 1-0으로 졌습니다만 우리도 아르헨티나를 꺾고 8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지요. 제가 결정적으로 루이스 피구의 플레이에 매료된것은 우리나라에도 위성방송이 시작된 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당시 KBS 위성방송에서 한두달 지난 바르셀로나 경기를 해주었는데, 이때의 호나우두, 그리고 루이스 피구의 플레이는 정말로 멋있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루이스 피구하면 바르셀로나의 저지입은 모습을 떠올립니다.

피구는 여느 윙플레이어와는 좀 다른 분위기가 있죠. 발빠르고 터프한 윙플레이어가 아니라, 묵직하지만 빠르고, 킥이 정확한데다 드리블까지 좋습니다. 현란한 발재간을 부리지는 않지만 그의 드리블은 정말 효율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에우제비오 (우리아버지는 유세비오라고 합니다. 저도 어릴때는 그랬고요)의 활약이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유럽의 축구변방(?) 포르투갈을 일약 세계정상급 강호로 떠올린 유로 2000 대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월드컵을 제외하면 해외축구 생중계가 잘없던 시절에 당시의 유로 2000대회 중계는 지금의 해외축구 열풍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포르투갈의 선수들이 얼마나 대단했던지요.

루이스 피구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주전자리를 빼앗기고 월드컵에서 우리한테 지고 쓸쓸히 귀국할때 저는 이제 더이상 국제무대에서 그를 보기가 어려울줄 알았는데, 그는 여전히 지지않는 태양처럼 오늘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 새벽 3-4위전이 그의 포르투갈 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되겠지요.

이번에 포르투갈이 사실 우승할 전력은 아니었고 우승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저야 잉글랜드 팬이지만) 4강이라는 성적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성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은 여전히 있습니다. 아마 당대를 풍미한 대스타의 마지막 모습이 더 화려했으면 하는 마음일까요. 어쩌면 만화처럼 확 우승시켜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저의 비현실적인 바램을 실현시켜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루이스 피구보다 더 위대하단 평가를 받고 있는 당대의 축구황제 지네딘 지단이죠.

이번대회 시작때만해도 프랑스는 지네딘 지단의 노쇠화를 걱정해야 했고, 거기에 감독과의 불화설등이 겹쳐 최악의 조예선을 맞았고 예선탈락의 위기에 까지 몰린끝에 16강에 조 2위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내 강력한 우승후보인 스페인과 브라질, 그리고 루이스 피구의 마지막 불꽃 포르투갈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모레 새벽에 이탈리아와 결승전을 하게 되었죠.

98년 프랑스 월드컵,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프랑스의 우승을 이끈 지단은 2000년 유로 대회우승으로 이제 프랑스의 시대가 온것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2002년으로 이어지는 불운과 부진으로 축구사에 반짝 프랑스시대를 열다 사라질것 같았지만 2002년의 좌절을 되풀이 하지 않고 황제다운 저력과 묵묵한 노력으로 기어이 프랑스를 결승에 올려놓아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지켜냈습니다.

특히 백미는 이번대회 준결승이었던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대결, 두 전설의 대결은 결국 지네딘 지단의 승리로 끝이나고, 당대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두선수는 경기후 뜨겁게 포옹을 했습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마자 지단은 동료들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에 앞서 피구부터 찾아 그를 격려하고 그의 월드컵 우승을 향한 마지막 도전이 된 경기를 빛내주었습니다. 그 역시 월드컵의 마지막 경기가 한경기밖에 더 남지않아서인지 그의 피구에 대한 마음은 남달랐겠지요.

오랜 라이벌이자 동료인 이들의 뜨거운 포옹이야말로 이번 월드컵 최고의 명장면이자 축구가 주는 큰 감동이 아닌가 합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미워하지 않는 신사들의 스포츠가 바로 축구입니다. 아마 피구와 지단, 당대 최고선수들중 가장 기품있는 두선수가 아닌가 싶어요.


경기 종료휘슬이 나자마자 오랜동료인 피구에게 달려가 셔츠를 교환하고 포옹을 하는 지단,
아마 이런 우정과 서로간의 존경심이 있기에 피구는 졌지만 행복한 은퇴가 되지 않았을까요?


프랑스의 결승전 상대인 이탈리아 이야기를 안할수가 없습니다.
저는 잉글랜드 팬이라고 했지만 2002년 전까진 사실 오랜 이탈리아 팬이었습니다.

제가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축구, 그 푸른색 셔츠에 매료된것은 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티비에서 보았던 82 스페인 월드컵 기록영화와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스페인 월드컵의 영웅은 단연 파울로 로시였지요. 승부조작 파문에 휘말려 선수자격을 박탈당한 그가 월드컵을 앞두고 전격 사면되어 득점왕과 팀 우승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전설적인 선수로 남게되는 그런 스토리가 있었던 월드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랑스를 응원하려 합니다. 먼저 지네딘 지단이라는 당대의 영웅에 대한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것 같고 (그가 피구를 꺾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최근 터진 세리아 쇼크를 보고 실망했기 때문이죠.

세리아 쇼크는 사실 새삼스러운것은 아닙니다. 프랭클린 포어의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나'에 보면 이탈리아 축구관련 쳅터가 았는데 여기 유베와 밀란의 나눠먹기식 비리가 비교적 상세히 서술되어 있죠. 심판 선임부터 리그 전반에 걸쳐서 두팀의 영향력이 불법행위에 까지 미친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증거가 없다고 저자는 분명하게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모지가 있었던 몇년새 있었던 일도 아니고, 수십년이 넘은 관행이지요.

위대한 영웅의 마지막 경기를 이런 부도덕한 팀이 막아서서는 안되겠지요.

이번 결승전이 지단에게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도 이탈리아가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다, 명예를 중시하는 이탈리아 선수들이 이번 스캔들이 자신들의 실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사력을 다 할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에서 영웅이 더욱 빛나는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단의 팬은 아니지만 이번 경기만큼은 지단이 멋있게 이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경기를 이겨 월드컵 우승을 이룬다면 지단은 현역시절 두처례의 월드컵 우승과 한차례의 유럽컵 우승으로, 아마 펠레, 마라도나같은 축구의 신 계보에는 못낄지 몰라도 베켄바워나 요한 크루이프같은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 길이 남겠지요. 아마 프랑스 축구 또한 지단과 함께한 시절이 가장 화려한 시절이 될 것입니다.

비록 티비로 보아야 하지만, 이런 대가들의 빅경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늘 행운으로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