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적인 80년대 초반, 차붐은 영웅이었다.
지금의 프리미어 리그 박지성 신드롬이나 90년대 후반 메이저리그 박찬호의 열풍과 곧잘 비교하기도 하지만 훨씬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당시의 한국사회가 다양성을 가지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차붐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우상이었고 축구에 있어서는 절대자적 권위를 가지는 상징적인 단어였다. 나는 나이가 어린탓에 차범근이 독일 분데스리가에 간 이후의 모습을 기억하지만 축구팬도 아닌 할머님 할아버님께서도 차범근은 나오면 골을 넣는다고 말씀하시는것으로 보아 분데스리가에 가기 전부터도 특출난 선수였던것은 확실한듯 하다.
내가 기억하는 내 어린시절의 차붐은 이렇다.
초등학교 다닐적, 학교에는 소년 조선일보인지, 소년 동아일보인지 하는 소년신문이 몇부씩 교실에 비치되었는데, 주로 신문에 연재되는 만화만을 보던 나는 만화를 통해 처음 차범근을 알게 되었다. '축구소년 차범근' 쯤 되는 제목의 이만화에는 어린시절 경기도 화성 시골 소년이었던 차범근은 어머님께서 꼴 좀 베어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면 (근데 꼴이 뭔지 요즘은 잘 모를것임) 늘 허리에 차고 다니는 깡통을 차면서 산넘어 달렸고, 오는길에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산속 무덤가를 지나기가 무서워 더 빨리 깡통을 차며 달렸다는 식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차범근은 축구선수 차범근이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는 이미 만화속의 슈퍼히어로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만화속의 슈퍼히어로로 처음 알게되었고, 가끔씩 보여주는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이 골넣는 장면을 보면서 차범근은 이미 판타지 스타의 자리를 가졌였다. 지금과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가 축구의 황제라고 알고있는 호나우두나 호나우딩요등과 비교되는것이 맞지 박지성과의 비교는 무리가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랬다.
분데스리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80년대 중반까지 분데스리가는 세계최고리그였다. 당시의 독일축구가 얼마나 강했었는지를 상기해보라. 분데스리가는 해외축구의 대명사요, 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그와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 축구 메이저리그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80년대 중반까지가 분데스리가, 80년대 중반 AC밀란의 부상으로 상징되듯 세리아가 최고리그의 자리를 10여년간 지키다가, (90년대 초반 케이블 티비에서 하는 몇달 지난 챔피언스리그 유벤투스 경기를 녹화해두고 몇번이나 되돌려 봤던지) 90년대 후반 스페인으로 기우는가 하더니 (바르셀로나 호나우두의 활제 등극!) 2000년대들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가 거의 대세인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린것이다.
프리미어리그가 항상 지금처럼 그랬느냐하면 이것이 참 웃긴다. 왜냐면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축구의 종주국 답지않게 프로리그는 왜그리 허접하냐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프리미어 리그다. 스타는 없고 주로 자국선수에다 아시아 축구팬이 이름만대도 아는 선수는 라바넬리같은 한물간 스타밖에 없는 리그였던 프리미어 리그다. 한물갔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그정도로 잉글랜드 리그로 갔다는것은 소위 내리막길로 통했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불과 10년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러니 앞으로의 일도 모르는 것이겠지.
여하튼 이런 차붐을 처음으로 비교적 자세하게 충분히 가까이서 (물론 TV로) 볼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86년 멕시코 월드컵이었다.
멕시코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우리나라 축구계는 큰 논란에 빠졌는데 그것이 바로 차붐을 본선에 합류시키느냐 아니냐는 것이었다. 격론끝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최순호의 투톱파트너로 결정되었다. 나는 태어나서 이때 '투톱 시스템'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어보았다. 상대팀에서는 넘버 11 차붐만 막아라! 라는 얘기도 했다고 하고 (물론 우리나라 신문에서) 한국 축구팬들은 우리도 세계적인 공격수가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차붐의 플레이에 실망했다. 그 수많았던 오프사이드,
지금 생각하니, 그리고 당시의 경기를 다시보니 그것은 심각한 호흡의 불일치였다. 뒤늦은 생각이지만 당시의 여건이었다면 차붐이 합류하지 않았던 것이 좋았을지 모르겠다. 하긴 아무리 세계적인 공격수라고 하더라도 월드컵 얼마전에 좀 맞추어 보고 무슨 조직력이 있었겠나 싶다.
박지성도 훌륭한 선수지만 아직 차붐과 비교될 단계는 아니다.
차붐과 비교될려면 적어도 한팀의 레전드로 인정받은 후라야한다. 차붐의 커리어는 그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다. 물론 이렇게 성장한다면 박지성이 언젠가 차붐을 능가할수 있는 커리어를 쌓고 있는 유일한 선수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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