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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속 '안드레 아가시'

안드레 아가시가 은퇴했다고 합니다.


내가 축구보다 앞서 처음으로 깊이 빠져들었던 스포츠는 바로 '테니스'였습니다. 테니스를 배워야겠다고 첨 생각했던 계기가 바로 중학교 1학년때였던 86 아시안 게임이었지요. 당시에 온 나라가 안재형, 유남규로 이어지는 탁구열풍을 앓고 있을 때였지만, 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사상 유례없는 테니스 전관왕 (단식 복식 혼합복식 단체전)의 위업을 이룬 유진선과 그의 복식 파트너였던 김봉수였습니다. 저는 특히 파워풀한 유진선의 플레이보다 아기자기한 김봉수의 플레이에 매료되었는데 특히 복식 결승전 매치포인트에서 서비스 포인트를(에이스는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가물가물...) 따내고 유진선에게 뛰어가 폴짝안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이당시의 한국 테니스는 유진선, 김봉수, 송동욱이라는 사상 최고의 트리오로 인해 전성기를 누렸었지요. 아시안게임 전종목 제패를 이룬 유진선, 올림픽에서 당시 세계 탑10 플레이어였던 앙리 르콩트를 무찌른 김봉수 (르꽁트가 배탈났었다고 합니다만..^^) 무엇보다 데이비스 컵에서 세계랭킹 42위였던 (기억생생!) 파울로 카네를 무찌른 송동욱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하던 대사건), 정말 생각만 해도 가슴벅찬 일이었습니다. 데이비스컵 프랑스 원정길에서는 비록 당시 프랑스 최고의 플레이어였던 야니크 노아 (루드 굴리트같이 생긴)를 빼긴 했지만, 세계 복식랭킹 1위였던 기 포르제같은 선수와의 대결은 잡지 화보로만 보아도 설레던 사건들이었지요.

1987년에 대 사건이 일어납니다.

선진국에서만 열린다던 세계 남자 테니스 프로 투어가 서울에서도 열리게 된 것이지요. 이름하여 칼컵 서울 오픈입니다. 2부리그격인 챌린지급 대회는 있었지만 본격적인 1부 투어대회가 생긴것은 유사이래 처음이지요. 제가 중학교 2학년때였는데, 지방인데다 나이도 어려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티비 중계해주는 경기는 챙겨보았죠. 아시안게임때 집에 비디오도 장만했겠다 (^^') 뭐 좋았습니다.

이 대회가 제가 기억하기로 10만불이 쪼금 안되는 상금 규모를 가진 ATP 투어 중에서는 가장 낮은 대회였지만, 그래도 엄연히 정식 프로투어라서 지금껏 우리가 보던 선수들, 즉 세미프로 대회에 나오던 외국선수들이나 유진선한테 캐관광 당하던 아시아 선수들이 아닌 세계 100위권이내의 본격 해외 프로선수들이 온다는 것이었지요. 이형택이 50위권에 들어갈때도 있는 지금에 비하면 우스운 소리겠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유진선, 김봉수, 송동욱이 우주에서 젤 잘치는거 같은데, 대체 저놈들이 얼마나 잘치기에 우리 형아들 랭킹이 298위밖에 안되는겨? 하는 심정으로 쳐다보기를 며칠이었습니다.

먼저 결과를 말씀드리면 한국선수는 총 4명이 출전했는데, 유진선, 김봉수, 송동욱 트리오에 당시 국가대표선수였던 노갑택이 출전했습니다. 당시의 테니스 판도가 위의 4선수가 전성기, 김춘호 전영대가 한물가던 그런 시절이었죠.

노갑택은 1회전탈락, 김봉수와 유진선이 맞붙은 또다른 1회전에서는 김봉수 승, 송동욱은 선전을 펼치며 2회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2회전에서는 전원 탈락했지만요.

이대회의 탑시드는 당시 아시아선수로서는 최고의 실력을 구사하던 인도의 '라메쉬 크리시난'이라는 선수였습니다. 기억하기로 세계 랭킹 30위권이었죠. 이 당시의 여자 랭커로는 한국계인 '그레이스 킴'이라는 선수도 있었습니다. 20위권이었고 미인이었죠. ㅎㅎ.

각설하고 라메쉬 크리시난은 칼컵에서 우승후보로 야심차게 모셔온 스타플레이어였는데 1회전에서 탈락해 버리고 말죠. 2번시드는 세계랭킹 5-60위정도 되었던 미국의 '짐 그랩'이었습니다. 이선수는 요정도 랭킹을 전전하다 은퇴한 선수인데, 그가 우승한 대회중 하나가 바로 이 칼컵 서울 오픈이었죠. 이선수의 결승전 상대가 바로 그토록 사설을 길게 뽑았던 이 위대한 '안드레 아가시'였습니다. 대회기간 내내 안드레 아가시는 우리 언론을 확 달아 오르게 했습니다. 17세의 테니스 신동이라느니, 미소년 스타라느니, 금발의 천재 소년이라느니, 지금하고는 전혀 이미지 다른 찬사로 뒤덥혔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존 메켄로와 보리스 베커의 열혈 추종자로 베이스라이너, 특히 투핸드 스트로크를 극도로 경멸하던 테니스 동호인이었기 때문에, 이 '베이스라이너' 안드레 아가시에 대해 시큰둥했지만 당시의 경기는 놀라웠습니다. 베이스라이너가 저렇게 공격적일수 있다니 말이죠. 한물간 비욘 보그 (요즘은 비외른 보리라고 합디다) 나 후계자 마츠 빌란더 (요사람도 마츠 빌란데르라고 요즘은 합니다)와는 분위기다른 베이스라이너 출현에 나도 모르게 주목하고 말았죠.

대회가 끝나고 당시 유일한 테니스 잡지였던 '월드 테니스'에서는 아가시 사진으로 도배되고 난리도 아니었죠. 당시 랭킹 70위권이었던 아가시는 대회후 인터뷰에서 대회기간 내내 한국팬들이 보내준 성원에 힘입어 다음과 같은 멘트를 날리죠.

'서울 오픈은 내 생애 첫 ATP 대회 결승진출한 대회이다. 서울을 잊을수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서울 오픈에 참가하고 싶다'라는 진심어린 멘트였습니다.

정말 서울대회에서부터 발동걸렸는지 대회가 끝나자 얼마안가 이 신동 안드레 아가시는 세계 테니스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고, 이듬해 서울오픈이 열릴 즈음에는 그의 랭킹이 세계 20위권이 되어있었습니다. 약속을 지킨 의리의 사나이 안드레 아가시는 사실 20위권이 참가하는 대회가 아님에도 서울오픈에 다시 참가해 주었고,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한국팬들은 그를 볼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습니다.

그 이듬해부터는 아시다시피 안드레 아가시는 세계 정상을 다투는 선수로 성장하여 더이상 한국에서 그를 보는 일이 힘들어 졌습니다.

제가 테니스를 정말 사랑하던 시절의 일이고, 기억들이기 때문에 안드레 아가시라는 선수는 저에게 늘 위의 저 기억들과 오버랩됩니다.

저는 존메켄로의 신으로 알았고, 보리스 베커의 윔블던 제패에 열광했고, 마츠 빌란더 보다는 스테판 에드버그 (요즘은 스웨덴 발음으로 에드베리라고 합디다 ^^, 당시 제 라켓이 에드버그가 쓰던 윌슨 프로스태프!, 우리 아버지께서 아들을 위해 미국 출장길에서 사옴), 제일 시시한 플레이어는 이반 렌들 이었죠.

그때부터 안드레 아가시가 제 기억에 추가가 되었습니다. 우승했던 짐 그랩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던 안드레 아가시.

어느날 부터 이 금발의 미소년이 머리를 빡빡 깍고 나오더군요. 저는 스스로에대한 채찍질 정도로 이해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닌것이었지요. 이 미남에게 이런일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지금은 안드레 아가시의 금발 미소년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팬들도 많은것 같습니다. 별로 오래전도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금발 미소년이던 시절의 사진하나 올려봅니다. 옷색깔을 보니 서울오픈당시의 사진은 아닌것 같은데, 암튼 찾기 힘드네여.

아, 여담으로 한마디 더 하면, 당시 유진선, 김봉수가 날아다닐때 일본에 '마츠오카 쇼조'라는 허접한 루키가 한명있었는데, 이 녀석은 허우대는 멀쩡해도 소위 우리 3인방에는 '쨉'도 안되는 녀석이었죠.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가 테니스 인프라가 좋은데다 여자 테니스는 그래도 선진국축에 속하는 나라여서, 이 녀석이 무럭 무럭 성장하더니, 언젠가부터 두각을 나타내더니 심지어 윔블던 16강에 진출하여 동아시아 최초로 센터 코트까지 밟아보는 영광까지 누리는 것을 보고 역시 재목보다 인프라, 환경이 중요하구나 새삼 절감했습니다. 정말 'x밥'도 아닌 녀석이었는데 말이져.

지금 유진선, 김봉수, 송동욱에 이어, 장의종, 윤용일같은 선수도 있었고, 지금 이형택이 신기원을 써내려가고 있지만, 아직 인프라는 거기서 거긴거 같습니다. 아쉬운 일이죠. 언젠가 여자 골프처럼 될 날도 오리라 믿습니다. 저는 사실 한국이 월드컵 축구 우승하는것보다 윔블던 남자 단식 우승하는게 더 힘들다고 믿었는데, 이형택 보고 생각이 좀 바뀌려 합니다.

그나저나 중1때부터 대학 1학년때까지 몰두했던 테니스를 개인적인 사정으로 손놓게 되어 조금은 슬픕니다. 다시 테니스 라켓을 잡는게 제 꿈이기도 합니다. 보리스 베커의 '붐붐 서브'를 연습하던 기분은 그대로 인데 말이져.

-빅조크